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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도의 연혁

    조선시대 숙종 23년(1697) 우도에 국영목장을 설치하였다. 현종 8년(1842)에 제주 주민들의 우도개간 요청이 받아들여져 주민 몇 가구가 이주하였고, 1844년 김석린 진사 일행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00년 서당 훈장 오완철(오유학으로도 불림)을 중심으로 우도라는 명칭을 "연평"이라고 개칭하였다. 1986년 4월 1일 면으로 승격되면서 북제주군 우도면이 되었고,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으로 제주시 우도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역사

    천진동(天津洞)이었다. 1915년경 인구의 증가로 동•서로 나뉘어졌고, 1986년 4월 1일 구좌읍 연평출장소가 우도면으로 승격되면서 동•서 천진동을 합병 천진리가 되었다.

    원래는 「한나루」였다. 천진동은 한(큰) + 나루(津)의 잘못된 한자 표기이다. 즉 「대진(大津)」으로 표기해야 하는데 「한나루」를 「하늘나라」, 「하늘이」로 잘못 풀이하여 한자식으로 동명을 개칭하면서 「천진동(天津洞)」이 되었다.

    현재 우도의 관문이며 우도 최대의 포구인 우도항이 있는 곳이다.

    지명유래

    비께통

    「넙대기 여」가운데 물통과 같이 움푹 패인 곳이 있다. 이곳에는 「비께(두릅상어)」가 많이 서식하며 산란기에는 새끼를 낳기도 한다. 30∼40년 전만 해도 장정들이 이곳에서 「비께」를 맨손으로 잡기도 했다.

    「비께」를 잡을 때는 큼직한 하야 수건을 막대기에 칭칭 감아서 「비께」앞에 내밀면 「비께」가 이를 물고 놓지를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자맥질을 하여 「비께」를 안아올렸다.

    어느날 해녀가 이곳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다 「비께」에게 유방을 물렸다. 「낫」과 「비창」으로 「비께」의 눈과 얼굴부위를 아무리 쑤셔도 놓지 않자 해녀는 「비께」를 안고 해안에 올라와 날카로운 막대기로 「비께」의 항문을 통해 척추에 자극을 주어 「비께」의 입을 열어 해녀가 살아났다는 일화가 있다

    들렁머리

    「등머흘」에서 동쪽으로 20∼30미터 가면 넓은 「빌레(암반)」을 만난다. 이 앞에 또 하나의 「볼락」여가 있다. 썰물일 때는 바지가랭이를 걷으면 옷을 젖지 않고도 「볼락여」에 갈 수 있다. 이 암반과 「볼락여」 사이는 물이 '들락날락' 하므로 각종 고기가 많이 서식한다.

    물이 들고나면 「목」이라서 「들렁머리」이다.

    등머흘

    우도항에서 「섬머리」동쪽으로 방조제가 시설되어 있다. 이 위에 올라서면 둥글고 작은 돌들이 쫙 깔려 있는 해안을 보게 된다. 여기가 바로 「등머흘」이다.「등」은 사람의 등과 같이 넙적하다는 뜻이고 「머흘」 또는 「머들」이라고 하는데 제주어로 「자갈」 혹은 작은 돌들을 말한다.

    달 그린안

    우도팔경중 하나인 주간명월(晝間明月)을 말한다. 「코고망」을 통해서 들어온 햇빛이 물위에 반사되어 암벽 천정에 동그란 달이 뜬다. 이를 '달이 그려진 안쪽'이라 해서 「달 그린안」이라 한다. 11월 20일을 전후한 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주간명월을 볼 수 있다.

    일명 태음지굴(太陰之窟)이라고도 한다.

    모기왓 동산

    우도봉 등대로 오르는 길목에 움푹 패인 습지가 있다. 습기가 많으므로 자연히 모기가 서식하기 마련이다. 모기가 많다하여 「모기왓 동산」이다. 「왓」은 「밭」의 방언이다



    봉만이 오름

    천진동에서 우도봉 정상으로 오르는 중턱 남서쪽에 야트막한 동산(오름)이 있다. 봉만이란 사람의 소유였다 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